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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리에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는 분명히 있다.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 곳곳에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노블레스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들의 애국심과 용기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설명하는 서구 노블레스들의 강력한 도덕적 권위의 원천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선조들의 위대한 족적을 되새겨 오늘날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부활시키는 바탕으로 삼고자 한다.
과거의 많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례 중에서도 유독 근대 일제강점기의 의인들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은 그 분들의 행적이 역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으나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임에도 상당수 후손들의 관심 밖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 공헌한 부자의 전범, 경주 최부자 가문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논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 경주 최부자 집안이다. 경주 최부자 집안은 무려 300년 동안 만석의 재산을 유지했으며 많은 선행과 독립운동의 후원자 역할을 통하여 부자로서는 드물게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최씨 집안은 권력을 멀리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였으며,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고, 검소하게 살며 자선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항일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전 재산을 바치는 것으로 기나긴 부의 세습을 마무리했다. 참된 부자의 전범이 아닐 수 없다.
'부자가 3대 가기 힘들다'는 옛말을 무색하게 만든 경주 최부자 가문은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19세손인 최국선(崔國璿, 1635~1682)으로부터 28세손인 한말의 최준(崔浚, 1884~1970)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그 부를 유지하였다. 이렇게 장기간 한 집안이 부를 유지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최부자 집안이 칭송을 받는 것은 부를 많이 축적했고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자선 활동과 사회공헌으로 지도층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최부자 집안의 모범은 한, 두 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집안의 전통으로 전해내려 온다는 점에서 음미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최부자 가문의 기본적인 생활지침은 육연(六然)이라는 가훈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육연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처신함에는 초연하게 행동하라), 둘째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을 대할 때는 온화하게 대하라), 셋째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라), 넷째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라), 다섯째 득이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처신하라), 여섯째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에도 태연하게 행동하라) 등이다.
최부자 집안의 가훈은 육연 외에도 보다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양반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하되 권력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지위는 필요하나 권력까지 가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도 되겠다. 요즘 식으로 해석하자면 정경유착은 피하라는 교훈도 될 것이다. 과거를 보라는 것은 학문을 가까이하여 지적능력을 기르라는 가르침이다. 지식과 최소한의 신분유지로 부는 지키되 권력은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은 오늘날의 자본가들에게도 금과옥조 같은 교훈이다.
2)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대단히 역설적인 가르침이다. 부잣집의 가훈이라면 재산을 늘리라고 가르칠 것 같은데 최부자집의 유훈은 정반대이다. 그러나 이 집안을 존경받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가르침 때문이다. 최부자집의 후손들은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부에 대한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그들은 이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소작률을 낮추어서 부의 혜택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로 퍼져나가게끔 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수확물의 절반을 지대(地貸)로 주는 병작반수제를 과감하게 도입하여 소작인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키웠던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소작인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고 최부자집의 재산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윈-윈 전략의 선구자적인 실천이었다고나 할까.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씨 집안의 셋째 원칙은 지나가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덕을 쌓고 인심을 얻으라는 가르침이다. 과객(過客)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선행을 베푸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손님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하는 수단도 되었다. 최부자집에서는 1년 소작 수입의 3분의 1인 쌀 1천 석을 과객을 접대하는 데 사용하였고 손님이 많이 머무를 때는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들이 베푼 적선의 규모를 알 수 있다.
4)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남의 불행을 치부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정의로운 경제활동을 하라는 뜻도 될 것이며, 이웃의 원성을 살 일은 하지 말라는 의미도 되겠다. 최부자집은 이웃의 어려움을 통해서 재산을 늘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웃이 어려울 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그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이렇게 얻은 인심은 다른 기회에 재산을 늘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최부자집의 재물에 대한 철학은 부를 축적하는 데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이 어려울 때를 축재의 기회로 삼는 요즘 기업인들에게도 크게 교훈이 되는 가르침이다.
5)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이웃과 나누라는 가르침이다. 그것도 사방 백리안의 이웃과 나누라는 것은 그 스케일 면에 있어서도 로마제국 귀족들의 선행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규모이다. 최부자집은 춘궁기나 보릿고개가 되면 한 달에 약 100석 정도의 쌀을 이웃에 나누어 주었고, 흉년이 심할 때에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바닥이 날 정도로 구휼을 베풀었다고 한다. 소작수입의 3분의 1을 빈민구제에 썼다는 것이다. 최씨 집안의 이러한 전통은 1대 부자인 최국선의 선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최국선은 신해년(1671)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지켜서 무엇 하겠느냐"며 곳간을 헐어 이웃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 이후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이 가훈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6)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집안의 살림을 사는 여자들에게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강조하는 이 가르침은 자신들에게는 박하고 엄격하게, 타인들에게는 후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최부자집 생활철학의 진수이다. 자신들을 낮추고 겸손하게 사는 생활태도는 요즈음 졸부들의 천민자본주의적 돈 쓰기나 생활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렇게 교육받은 후손들이 재산을 낭비할 리 없으므로 이 교훈이야말로 300년 동안이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비결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핵심이 아닐 수 없다. 사학자 조용헌은 그의 저작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에서 최부자집 사례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 이러한 최부자집의 가훈을 '한국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지칭하였다. 최부자집의 부는 마지막 부자인 최준의 대에 와서 길고 긴 300년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나 그것은 부의 끝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공헌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 문파(汶坡)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오늘날의 영남대를 설립한 교육 사업가로서 우리의 근대사에 독특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거부이면서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나라 일을 걱정하던 최준은 1914년, 부산에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회사인 백산상회를 설립한 백산 안희제를 만나게 된다. 백산상회는 겉으로는 무역회사였으나 내용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1919년 5월 백산상회는 자본금 100만 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하게 되는데, 이때 최준은 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백산무역은 서울, 대구, 원산, 만주, 봉천 등지에 지점을 설치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으나, 상해임시정부 등 독립운동단체에 자금을 계속 지원하다보니 경영은 날로 악화되었다.
최준이 상해임정에 자금을 송금한다는 사실을 탐지한 일경은 그를 경찰서에 수감하고 수시로 혹독한 고문을 하였다고 한다. 계속되는 일경의 감시로 백산무역의 자금난은 날로 심각해졌고 결국 최준은 1927년 110만 원이라는 엄청난 부채를 떠안고 파산하게 된다. 광복 후 최준은 그때까지 남은 전 재산은 물론,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과 장서류 8000 권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교와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최준과 그의 둘째동생인 최완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최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1921년 35세로 순국했다.
최준의 바로 아랫동생인 최윤은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죄로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윤이 중추원 참의를 지낸 것은 집안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희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치하에 국내에 있었던 자본가 집안으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선택 이었으리라.
생각해보면 일제치하에 대지주 집안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사업을 했다는 것은 군사독재 치하에서 재벌이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준의 증손자는 현재 창원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고 있는 최성길(崔成吉)이다.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간 우당 이회영 집안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일가 역시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특히 독립운동을 논하는 데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집안이다.
이회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삼한갑족(신라, 고려, 조선 3조에 걸쳐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인 경주 이씨 백사공파 집안 출신으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11세손이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는 이항복 이래 8대에 걸쳐서 연이어 10명의 재상(4명의 증영의정(贈領議政)을 포함, 9명의 영의증과 1명의 좌의정)을 배출한 조선조 최고의 명문이다.
해방 후에는 이회영의 동생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이 초대 부통령을 역임해 집안의 명성을 이었다. 이회영의 아버지는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이다. 이회영은 1901년 근대적 신교육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삼포(蔘圃)를 경영하다가 일본인들의 약탈로 실패한 뒤 1908년 장훈학교(長薰學校)를 설립하고 안창호, 이동녕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무실역행(務實力行)을 행동강령으로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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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프레시안 |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만주에 무력항쟁 기지를 설립할 구상을 하고 전 재산을 처분한 뒤 1910년 12월 추운 겨울에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게 된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이 넷째인 이회영이었다. 그때 처분한 재산이 사료에 따라 조금씩 추정치가 다르나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600억 원에 이르는 거금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때 만주로 간 우당 6형제는 첫째 이건영(李健榮, 1853~1940), 둘째 이석영(李石榮, 1855 ~1934),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다섯째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여섯째 이호영(李頀榮, 1875~1933) 등이다.
이때 만주로 가던 이회영이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배로 건너면서 뱃사공에게 원래 뱃삯의 두 배를 지불하며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독립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배로 건너게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정착하여 인근의 땅을 매입하고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다. 경학사는 계몽운동의 이념이었던 식산흥업·교육구국론에 입각하여 생산과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경학사 설립과 동시에 부설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도 설치했다. 그러나 경학사는 1912~1913년에 걸친 흉작으로 곧바로 운영난에 부딪힌 데다 중국 관헌들의 탄압까지 겹쳐 1914년 해산되고 만다. 경학사는 3년 정도밖에 운영되지 못했으나, 그 조직경험은 그 후 중국 동북지역을 주 무대로 활동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신흥강습소도 후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敎)로 개편돼 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학교의 교주(校主)는 둘째인 이석영이 맡았고, 교장에는 석주 이상룡(李相龍), 교관으로는 이동녕, 윤기섭, 이관직, 여준 등이 있었다. 학비와 숙식에 드는 비용은 모두 무료였다. 그 비용을 우당 집안이 망명하면서 가지고 온 재산으로 충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제1회 졸업생은 변영태, 김훈, 김도태, 이범석, 오광선 등이었으며, 우당의 아들인 이규학(李圭鶴, 1896~1973)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학교가 1930년 폐교될 때까지 배출한 수 천 명의 독립군들이 후일 청산리와 봉오동전투의 감격적인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1918년에 이르러 고국에서 가지고 온 자금이 바닥나자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고 국내로 다시 잠입하여 고종의 중국 망명을 도모한다. 그러나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그 계획은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고종의 망명 계획 실패 이후, 이회영 일가는 중국의 빈민가를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하게 된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기가 일쑤였으며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옷까지 팔아 겨우 연명할 정도였기 때문에 가족들 중 누구 하나 바깥으로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우당은 생활의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와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등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1921년에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무정부주의 운동을 벌이며 분열된 임시정부의 단합을 위해 조정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 후 1925년에는 비밀결사조직 '다물단'의 배후 역할을, 1931년에는 한중 합작으로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여 의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또 '흑색공포단'이라는 행동대를 조직하여 활동해 일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러나 1932년 11월 지린성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 공작망조직과 만주 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다롄(大連)으로 가던 도중 끝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이역 땅에서 옥사하게 된다. 우당의 나이 이미 환갑이 훨씬 지난 65세였다. 우당의 6형제 중 5명이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조국의 해방도 보지 못한 채 타국 땅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것이다. 또한 5형제를 포함한 가족 대다수는 굶주림과 병, 그리고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섯째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만이 유일하게 해방 이후 살아서 귀국할 수 있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성재는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여 1951년 부통령을 사임하였다. 불의를 보면 좌시하지 못하는 가문의 전통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계속된 셈이다. 우당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회영의 형제는 물론 그 자제들도 대부분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그들 또한 이국땅에서 엄청난 고초를 겪었고 상당수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전 국정원장 이종찬(李鍾贊)과 국회의원 이종걸(李鍾杰)이 우당의 직계손자들이다. 명문가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온 가족이 고난의 길을 자청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회영 일가의 일화는 사회적, 도덕적 책무를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다.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 왕산 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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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산(旺山) 허위(許蔿). ⓒ프레시안 |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이 나라 독립운동의 선구자다. 그는 한일합방(1910)이 되기도 전인 1908년에 의병투쟁으로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할 정도로 일찌감치 항일전선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민비시해 이후 의병활동과 관직을 넘나들며 맹렬한 애국운동을 펼쳤고, 그의 형제와 후손들까지도 항일 무장투쟁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희생했다. 그러나 그 결과 그의 후손들은 불행하게도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으며 해방된 조국의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허위의 장손녀인 허로자 할머니께서 80세의 고령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그동안 정부의 부실한 업무처리로 인해 그 알량한 독립유공보상금조차 지급받지 못했다고 하니 그의 집안에 큰 빚을 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지금부터라도 조국을 위해 온 몸을 던져 싸운 선조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 후손들을 배려하는 풍조가 생겼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허위는 1854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던 이름 높은 학자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세 분의 형님이 있었으니, 맏형 훈(薰, 호는 방산(舫山))을 비롯하여 둘째형 신(藎, 호는 로주(露州)), 셋째형 겸(蒹, 호는 성산(性山))이 그들이다. 요절한 둘째형을 제외하고 맏형 허훈은 한말의 거유로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친 대학자였으며, 셋째형 허겸도 만주·시베리아 벌판을 누비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였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그는 이기찬(李起燦), 이은찬(李殷贊), 조동호(趙東鎬)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협공하는 관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하자 그는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북도 진천까지 진격했으나, 의병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부대를 자진 해산했다.
그 후 허위는 대신 신기선이 고종황제에게 천거하여 벼슬길로 나가게 된다. 성균관박사, 주차일본공사수원(駐箚日本公使隨員),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 등을 거쳐 1904년에는 오늘날의 대법원장 서리에 해당하는 평리원서리재판장이 되어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송사를 처리하여 큰 칭송을 얻었다.
1904년에 접어들자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하게 하는 등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이상천(李相天), 박규병(朴圭秉) 등과 함께 일본을 규탄하는 격문을 살포했다. 그 격문에는 전 국민이 의병으로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만행에 대해 정부 관료들은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에서 왕산이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규탄에 나섰던 것이다.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이어 8월에는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등 국권은 사실상 일제의 수중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이때 군대해산에 반발하여 우리 군인들이 항전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의병봉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왕산은 1907년 9월 강원도와 경기도의 접경지인 연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킨 뒤 적성(積城), 철원, 파주, 안협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는 한편, 각지에서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고 친일매국노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던 중 전국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일본을 몰아내는 전쟁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48개 부대의 의병 1만여 명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조직되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왕산은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이 되었다.
이때 서울 진공작전의 선공을 맡았던 왕산은 300명의 선발대를 거느리고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군하였다. 그러나 왕산의 선발대는 본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화력과 병력 등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배하고 말았다. 이어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급거 귀향하자 왕산이 대리총대장 겸 군사장(軍師長)이 되어 총지휘를 맡게 되었으나 일본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서울진공 작전은 좌절되었다.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왕산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항일전을 재개하였다. 그는 조인환(趙仁煥), 권준(權俊) 등의 쟁쟁한 의병장들과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도처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왕산은 군율을 엄하게 정하여 민폐가 없도록 하였고, 군비조달 시에는 군표(軍票)를 발행해, 뒷날 보상해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 결과 주민들은 의병부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항일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경기도 북부지방에서 왕산의 의병활동이 활발해지자 이완용이 사람을 보내 경남관찰사 자리를 제시하며 회유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였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내부대신으로 임명하겠다고 유혹했으나 왕산이 크게 꾸짖어 쫓아버렸다고 한다. 또한 과거 고종에게 자신을 천거했던 신기선이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왕산은 이를 단호히 물리치고 최후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천명하였다.
1908년 4월 이강년(李康秊), 유인석, 박정빈(朴正彬) 등과 함께 거국적인 의병항전을 호소하는 격문을 전국의 의병부대에 발송했으며, 이어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 이기학(李基學) 등을 서울에 보내 고종의 복위, 외교권의 회복, 통감부 철거 등 30개 조의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고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결사항전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왕산은 이와 같은 원대한 포부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1908년 6월 은신처를 탐지한 일제에 의해 경기도 양평에서 체포되고 만다. 서울로 압송된 왕산은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일제의 한국침략을 당당히 성토함으로써 의병장으로서 절의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아카시는 비록 자기들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심문을 하면 할수록 왕산의 인품과 애국심에 감복하여 그를 국사(國士)로 대우했다고 전해진다.
이 해 10월 21일 오전 10시, 왕산은 서대문 감옥 교수대에 섰다. 서대문 감옥이 지어진 이래 최초의 사형 집행이었다. 왕산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왕산의 봉기는 대지주이자 유학자 가문이었던 허씨 집안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었다. 허위의 맏형이자 종손인 허훈은 3000마지기 땅을 팔아 군자금으로 내놨고, 셋째형 허겸은 허위와 함께 1895년 의병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허위의 사촌인 허혁도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근택 습격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경력이 있다. 왕산이 희생당한 뒤 그의 집안은 의병장 집안으로 낙인 찍혀 헌병과 밀정의 극심한 감시에 시달렸다.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한 왕산의 셋째형 허겸은 1912년 대대로 살아오던 경북 선산을 뒤로 하고 왕산의 네 아들과 두 딸까지 동반하여 서간도로 망명길에 오른다. 왕산의 사촌형제인 허필과 허혁도 몇 년 지나 그 뒤를 따른다.
그 뒤 허씨 집안은 석주 이상룡과 함께 남만주에서 부민단을 이끌며 교민들의 단합과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허위 세대가 의병을 일으켜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면, 다음 세대는 독립군 활동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희생했다.
왕산의 조카인 허형식(許亨植)은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에 북만주에서 활동한 뛰어난 항일 무장투쟁 지도자이다. 본명이 허극(許克)인 그는 만주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1939년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이 되었으며 1942년 8월 일본군과의 교전 중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허형식은 빛나는 무장독립투쟁을 했으나 중국공산당에서 활약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는 보상은 고사하고 그 찬란한 업적을 조명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허위의 아들이자 허형식의 육촌형인 허학은 의병활동을 한 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허형식의 사촌형인 허발과 허규, 육촌인 허국도 항일투쟁 혐의로 일제의 요시찰 대상에 올랐다. 또 허형식의 사촌 누이인 허길의 아들은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육사 이원록이다.
허위의 가문은 의병과 독립군 활동에 온 집안이 나서 희생했다. 그 결과 후손들은 불행하게도 이국땅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도 대부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조국이 허위에게 보답한 것이라고는 해방 뒤 그의 독립운동을 기려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길을 왕산로로 명명하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호를 추서한 것이 전부다.
직계 3대가 항일투쟁에 헌신한 임정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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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프레시안 |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집안은 직계 삼대 외에도 아우와 조카까지 합쳐 아홉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평생을 항일운동에 몸 바친 그의 일생에서 두드러진 족적은 군웅이 할거하던 독립운동계에서 항상 양보와 화합으로 항일조직의 결집과 내부역량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석주 이상룡은 1858년 경북 안동군 법흥동 임청각에서 이승목(李承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단발령을 공표하자 이에 항거하여 외숙인 권세연(權世淵)과 함께 구국 의병활동에 나선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군자금을 마련해 가야산으로 들어가 의병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구식 무기로는 일제의 신식 무기를 도저히 당할 수가 없어 신돌석, 김상태 등 의병장이 일본군에 참패하자 이상룡은 무기와 근대적 군사훈련이 부족한 의병의 한계를 자각하게 된다.
그 후 석주는 일제의 근대식 군사력에 대항하는 승산 없는 의병항쟁 대신 새로운 방향의 구국운동을 모색한다. 이때부터 그는 새로운 문물에 눈뜨기 위해 동서양의 새로 나온 서적을 백방으로 구하여 열심히 읽었다. 신학문으로 서양의 민주제도에 눈을 뜬 후, 먼저 집안의 노비 문서부터 불살라 버리고 종들도 모두 해방시켰다. 또한 그는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유인식(柳寅植), 김동삼(金東三) 등과 더불어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전개하고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나선다.
1909년 6월에는 계몽단체인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 회장에 선출되었고 여기에서 매월 2회씩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여 민족 자강운동에 앞장서나 1910년 한일합방으로 대한협회도 해산되고 만다. 한편 당시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서는 조국의 위기를 맞아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모색을 위해 해외에 독립군 기지개척을 추진하고 있었다. 주진수(朱鎭洙)와 황만영(黃萬英)을 통해 이 계획을 전해들은 석주는 1911년 1월 양기탁(梁起鐸)과 협의 후 뜻을 굳히고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여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그의 망명길에는 그의 뜻에 동조하는 친척과 동지 50여 가구가 동행하였다. 53세의 나이에 항일투쟁을 위해 자신의 고향땅을 떠나 이역만리로 간다는 것은 예사 사람이 내릴 수 있는 결단은 아니었다. 이상룡이 낯선 간도 땅에 도착하여 처음 정착한 곳은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였다. 그는 먼저 도착한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동휘(李東輝) 등과 더불어 그곳에 새로운 생활의 터전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독립군 기지 개척을 시작했다.
이상룡은 우선 동지들과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 사장을 맡아 벼농사를 보급하고 한인의 경제적 안정과 법적지위 보장 등 이주기반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그때까지 국경을 넘어온 동포들이 대부분 값싼 황무지를 빌어 화전 농사로 가난을 면치 못한 것을 본 그는, 삼원포 일대의 넓고 기름진 땅을 빌어 억새풀을 베어내고 벼농사를 짓게 하여 비로소 동포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했다. 간도에서의 벼농사는 이때 한인(韓人)들이 처음 시작한 것이다.
이상룡이 경학사 창설 이래 가장 심혈을 이룬 사업은 남만주 일대에 소학교를 세워 동포의 자질 향상을 꾀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무력 독립운동을 통해 조국광복에 이바지할 인재 양성을 위해, 동지들과 합의 하에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국내외 청년들을 모아 문무를 겸한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신흥학교는 그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이 후일 항일 전선에 앞장서게 된다. 경학사는 거듭된 흉작과 토착민들의 반발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민단(扶民團, 1912)과 한족회(韓族會, 1919)로 개편 발전하며 한인사회의 토착화에 기여했다.
1919년 4월, 만주의 한인 대표들이 모여 군정부를 조직하자 이상룡은 총재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같은 무렵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해외 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 있어야 한다'는 이상룡의 주장에 따라, 11월 군정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남북 만주의 비무력(非武力) 독립운동 단체 및 무력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의 활동이 돋보이는 것은 끊임없이 독립운동단체들의 단결을 추진한 그의 노력 때문이다.
1925년 상해임시정부는 임시정부 지도체제를 대통령 중심에서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로 바꾸었으며 이상룡을 초대 국무령에 선출했다. 이에 그는 임시정부의 내분을 막고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9월 24일에 국무령 취임식을 거행하고 개혁에 착수했다. 석주는 우선 일본군과의 접전 속에서 항일운동의 전위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 동삼성 지역의 김동삼(金東三), 오동진(吳東振), 김좌진(金佐鎭) 등을 국무위원에 임명하여 임정이 다시금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기를 바랐으나, 그들 대부분이 사양하여 그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상해와 간도는 각기 처한 독립운동의 상황이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간의 대립으로 인한 임시정부의 내분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크게 낙담한 이상룡은 임정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서간도로 돌아왔다. 서간도로 돌아온 그는 1928년 5월,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만이라도 통합을 이루기 위해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인 정의부(正義府)와 참의부(參議府) 및 신민부(新民府)의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만주 지역을 장악한 일제가 1932년 3월에 만주국을 수립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졌다. 그는 그해 5월에 길림성 서란 소성자에서 병을 얻어 그렇게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영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상룡의 행적을 언급하며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그의 처가에 관한 것이다. 석주의 처남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 1845~ 1914)에게는 세 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이들 중 맏이는 석주 이상룡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는 기암 이중업에게 출가하여 한일합방 때 단식으로 자결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며느리가 되었다. 이분이 바로 3.1운동 때 예안시위에 참가했다가 수비대에 잡혀 두 눈을 잃은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金洛) 여사다.
김대락은 이미 6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빼앗긴 경술년 엄동설한에 석주와 함께 만삭의 손부와 손녀를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식민지에서 증손자들이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일본신민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백하의 집안도 석주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온 문중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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