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로케이션:::서로 길목이 되어라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이유가 저들-극우수구세력들-의 아이돌이어서일까요? 아니요. 그만큼 쥐고 흔들기 만만한 상대기 때문입니다. 비리도 많고, 욕심도 많고, 정치는 잘 모르는데 나대기는 좋아하고, 무식해서 시키면 앞뒤 안 가리는 돌격대원 스타일이라서 간택된 겁니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간택될 때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정경유착이 얽혀있었습니다. 오죽하면 드라마 프로덕션의 대표도 그 줄에 서면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까, 아님 불이익이라도 당하지 않으려고 띠 두르고 선거운동에 나설 정도였습니다. 쥐새끼가 왜 죽어라 민영화를 외치겠습니까? 다 정경유착의 이해관계, 조중동의 요청에 충실하려면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승일 2008/05/30

(아래 글은 “창작과 비평” 07년 가을호에 발표한 글을 줄여서 부분 수정한 것입니다).

5개의 개혁진보 대안모델


87년 6월 항쟁 20주년과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을 맞은 오늘날 우리 사회는 심각한 경제사회적 갈등과 양극화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제는 절차적 민주주의보다 실질적 민주주의가 더욱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진보진영 내에서 높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실질적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경제사회 문제들을 일관된 세계관과 철학을 가지고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 해법을 둘러싸고 이른바 개혁진보 진영 내에서 나름대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다음의 5개로 정리될 수 있다.

(1)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론’ : 조희연, 조현연 등

(2) 노동중심 통일경제론’ : 손석춘, 박세길, 김병권 등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3) 사회연대국가론’ :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4) 사회투자국가론’ : 유시민, 김연명, 양재진 등

(5) 신진보주의국가론 : 이일영, 정건화, 조형제, 전병유 등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

이 글에서는 이들 5개 입장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함께 새로운 진보대안으로서 ‘복지국가 혁명론’(북유럽형 사회민주주의)을 제시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와 현 위기의 원인 진단

위 5개의 입장은 신자유주의와 관련,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원인 진단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1)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론과 (2)노동중심 통일경제연방론, 그리고 (3)사회연대국가론은 모두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시장개방, 시장개혁에서 찾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부의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령 이들 세 입장 모두 주주자본주의와 한미FTA를 거부하고 있다.

이에 반해 (4)사회투자국가론은 지난 10년간의 ‘시장주의 개혁’의 성과를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사회양극화의 원인을 IT기술의 발전에 따른 기술결정론적 요인과 그리고 인구고령화 등 비경제적 요인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긍정성, 가령 주주자본주의와 한미FTA의 긍정성에 주목하면서 더욱 높은 수준의 시장개방과 시장개혁을 주문하고 있다.

한편 이일영, 정건화 등의 신진보주의 국가론(5)은 이 논점에 관해 절묘한(?) 절충을 취하고 있는데, 박정희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재벌개혁과 금융개혁 등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의 성과와 긍정성을 대부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것과 불가분적으로 결부된 노동시장 유연화와 공기업 민영화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며 또한 그것이 초래한 단기주의 전략의 횡행과 고용의 질 저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또한 ‘능동적 세계화’를 주문하면서도 한미FTA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절충적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 대안적 경제사회 모델인가?

이렇듯 5개의 입장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안적 경제사회 모델에 관해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조희연 교수 등의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 국가론은 유럽형 사회민주주의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사회민주주의를 “국가주의와 성장주의의 한계에 갇혀 좌초한 20세기형 사회민주주의”로 규정하면서 “생태-평화주의를 접목한 더욱 이상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우리 사회 진보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먼저, 과연 독일과 프랑스, 스웨덴 등의 유럽 사회민주주의가 “국가주의와 성장주의의 한계에 갇혀” 있었는지 의문이거니와, 그로 인해 좌초했다는 것은 더욱 의아하다. 더구나 유럽과 미국의 68혁명에서 시작되어 유럽의 녹색당들로 오늘날 조직화된 생태환경과 평화의 가치는 이미 1980년대 이래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강령과 가치로서 폭넓게 수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생태/평화주의를 접목한 사회민주주의”는 세계사적으로 별로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한편 손석춘 등 새사연 역시 서구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인데 왜냐하면 그것 역시 노동주도성 원칙이 소실된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와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새사연은 IT기술의 가능성에 크게 주목하면서 현대적 IT기술이 가능케 하는 ‘경제의 지식기반화’와 ‘노동력의 지식노동자화’가 새로운 경제체제, 즉 ‘(지식)노동 주도 경제’를 가능케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새사연은 현대적 IT기술과 접목된 (지식)노동 주도 경제야말로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 나아가 사회민주주의 체제도 뛰어넘는 획기적인 체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IT기술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결부된 1990년대 말의 IT산업 버블과 벤처버블, 그리고 과장된 신지식인론 등의 폐해를 고려할 때, 그리고 IT기술과 결합된 오늘날의 금융세계화와 탈숙련 비정규직의 급증 등을 고려할 때, 새사연의 ‘(지식)노동 주도 경제론’은 아직 많은 미해결의 연구과제들을 안고 있다.

한편 민노당 진보정치연구소가 제시한 사회연대국가론은 교육복지와 숙련, 지식노동자화를 통한 high road형 성장전략과 노동자 경영참여 등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의 복지정책과 노동정책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당강령 차원에서 자본주의 배격과 사회주의 도입을 천명하고 있으며 서구형 사회민주주의 역시 자본주의와의 타협이라며 거부해왔다는 점을 상기할 때 민노당이 주장하는 ‘사회연대국가’가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를 뜻하는지 아니면 사회주의 국가인지는 모호하다.

위 3가지 입장이 서구 사회민주주의보다 더 좌파적(?) 혹은 더 반시장적 대안모델을 모색하고 있는데 반하여,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국가론은 서구 사회민주주의보다 더 우파적인 혹은 더 친시장적인 대안모델을 모색한다.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국가론의 주창자들은 대체로 영국의 안소니 기든스가 주장한 이른바 ‘제3의 길’의 사상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국가론의 경제사상과 노동, 복지사상 양쪽에서 다 관찰되는데, 먼저 양자 모두 지난 10년간 추진되어온 금융개혁과 기업지배구조 개혁 등 금융 및 기업 관련 개혁의 긍정적 성과를 인정하고 있다. 이는 90년대에 집권한 영국의 토니 블레어 노동당이 마가렛 대처의 보수당이 1980년대에 추진했던 ‘금융빅뱅’(그 결과인 금융세계화와 주주자본주의의 전면화)의 성과를 전면 수용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전통적인 케인즈형 복지국가를 거부하고 실직자 직업훈련 등 스웨덴식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의 요소들을 적극 도입하면서 ‘생산적 복지’를 주장했던 토니 블레어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국가론은 국가의 교육투자(인적자본 투자)와 지역혁신 클러스터(지역균형개발) 등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 국가론은 모두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표현되는 베버리지-케인즈형 복지국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기든스의 제3의 길에 대한 높은 관심에 대비되는 북유럽형 복지국가(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무관심 혹은 비판적 태도는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국가론 모두에서 관찰되는 공통점이다.


분배-복지정책과 조세정책

위 5개의 입장은 모두 분배정책 혹은 사회복지 정책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평생학습과 직업훈련, 아동보육과 장기요양 등 제반 사회복지 정책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모두 사회복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일부는 구체적인 정책들을 발전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에 공통적인 한계가 있다.

첫째, 위 5개의 입장은 모두 서구형 복지국가(사회민주주의)를 진부한 모델로 치부하고 있으며, 따라서 복지를 ‘정책’의 차원(즉 사회복지 정책)에서 ‘국가체제’의 차원(즉 복지국가)으로 격상시키는 것에 대해 무관심 혹은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먼저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국가론은 - 기든스의 ‘제3의 길’의 사상에 따라 - 복지국가를 베버리지-케인즈형 복지국가로 (부분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실패한 모델로 이해하고 있다.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론 역시 서구의 복지국가를 국가주의와 성장주의의 한계에 갖혀 좌초한 낡은 모델로 간주하고 있다. 노동중심 경제론 역시 복지국가를 노동주동형 경제를 창조하는데 실패한 진부한 모델로 치부하고 있다.

둘째, 복지국가 구상의 결여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위 5개의 입장은 모두 복지재원 마련을 위한 조세개혁 구상을 전개하지 않고 있다.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론자들은 조세개혁의 중요성과 그 구체적 방안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다. 이일영 등 신진보주의 국가론자들 역시 국민들의 맹렬한 조세저항을 거론하며 복지국가(사회민주주의)를 시기상조라고 못박고 있다. 박세길 등 노동중심 통일경제론자들마저 국민들의 조세저항을 거론하며 서구형 복지국가가 우리 사회에서 가능한지 회의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조세개혁 구상을 일부 발전시키고 있는 것은 그나마 민노당 진보정치연구소와 그리고 참여연대 정도이다. 이는 변호사, 의사 등 고소득 자영업자에 대한 조세투명성 강화와 조세감면 혜택의 축소 등 여러 가지 구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 상당수는 이미 재정경제부에 의해 채택되어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

하지만 재경부는 이러한 소소한 조세개혁을 넘어서는 획기적이고 과감한 조세개혁 구상을 맹렬히 반대하고 있다. 또한 중산층을 포함한 국민들 대부분 역시 실질적인 세액증가를 의미하는 조세개혁을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고 사회복지 재원을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 민노당과 시민단체들은 별다른 뾰쪽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재정적자 가능성을 무릅쓰고라도 국가적 복지지출을 과감하게 늘리며 동시에 소득세 누진율 대폭 확대 등 과감한 조세혁명과 이의 對국민 설득을 위한 논리적 토대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이는 이들 5개의 입장이 모두 공통적으로 베버리지-케인즈형 복지국가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진보주의 국가론을 주창하는 경제학자들은 - 실은 한국의 진보진영 경제학자들 대부분이 그러한데 - 균형재정론과 조세축소를 주장하는 신고전파 경제학 등 자유주의 경제학에 맞서 싸워온 케인즈 및 post-케인지안 경제학의 전통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비판적이기까지 하다.


실질적인 ‘실질적 민주주의’, 복지국가를 위하여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국민들의 삶의 불안이 이른바 민주정부가 집권한 지난 10년 동안 확실하게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민주화가 되면 과거보다 더 공정하고 더 잘사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은연중에 기대했는데 이것이 좌절되는 데서 오는 실망과 불만족이 매우 크다. 그런 점에서 지난 10년간의 민주주의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동안 개혁진보 세력은 투명성과 시장원리, 재벌개혁, 기술혁신, 혁신클러스터, 지역균형발전과 같이 ‘정상적 자본주의’를 ‘창출’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게 개혁진보 세력의 동의와 후원 하에 등장한 그 ‘정상적’ 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양극화의 문제들, 즉 국민들 개개인의 먹고 사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무관심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민주화를 이끌었던 사회적 연대 정신조차 무너져 버렸다. 높은 수준의 인격과 인간 존엄성을 추구했던 민주화의 기본정신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무능한 진보, 방향과 내용을 상실한 진보

왜 우리나라 개혁진보세력은 지난 20년간 복지국가 구상을 내놓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진보세력의 상당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의 눈에 핀란드와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도 결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불과하므로 더 이상 관심도 없다. 그들의 유일한 대안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항상 반대만 했지 구체적 대안은 한번도 제시한 적이 없다.

이에 반해 ‘현실주의’ 개혁을 주장해온 세력, 특히 시민단체들은 매우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했는데, 하지만 그 대안들 뒤에 있는 큰 방향은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노선과 대동소이했다. 이것은 특히 사회투자국가론과 신진보주의 국가론자들에게서 잘 드러난다. 투명성 강화와 기술혁신, 지역균형발전 등 ‘정상 자본주의적’ 발전이 이들의 주된 관심이며, 또한 그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사회복지와 복지정책을 말하지만 복지국가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즉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한 '정상적 자본주의'의 창출이 이른바 '개혁'의 최우선 과제였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10년간 한국의 개혁진보세력은 대안 제시에 무능했다. 무능한 진보라는 비난을 들어 마땅하다.



새로운 거대담론, 새로운 가치관 -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를 위하여

지금까지 살펴본 5개의 대안은 모두 있는 그대로의 (유럽) 사회민주주의를 한국사회에 적용하기를 회피하려 하는 것들이다. 이 중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론(조희연 등)과 사회연대국가론(민노당 진보정치연구소)은 그것을 좌파적 입장에서 회피하고 있고, 신진보주의국가론과 사회투자국가론은 그것을 우파적 입장에서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북유럽형 복지국가(사회민주주의)를 주창하여 그것을 세력화한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위 5개의 대안은 모두 유령에 대항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필자는 북유럽형 복지국가(사회민주주의)야말로 재벌개혁, 지역균형개발, 정부개혁 등 일체의 다른 개혁 아젠다에 우선하는 최우선 가치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는 재벌개혁, 지역균형개발, 혁신주도형 경제 등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필요하되, 단, 반드시 복지국가의 창출과 발전에 복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재벌개혁을 지금처럼 그저 '투명성' 혹은 '주주가치 실현'이라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하여 진행될 것이 아니다. '투명성' 등은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 '도구'에 불과하며, 그것을 도구로 하여 실현하고자 하는 내용, 실질, 목표는 복지국가 창조라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할 때, 만약 오늘날 금융투자자들이 재벌기업들에게 요구하는 투명성이 불가피하게 궁극적으로 투자자 이익 극대화로 귀결된다면, 그리하여 복지국가 창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그것을 거부하여야 하며, 새로운 내용과 실질을 담보하는 투명성을 추구해야 한다.

재벌개혁과 금융개혁, 지역균형개발도 -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 복지국가 형성과 발전에 반드시 복무하는 방향과 내용(실질)을 가져야 한다. 만약 독일식 콘쩨른법의 도입을 통하여 투명성 확보와 동시에 기업집단의 지배구조(경영권)을 안정화시킬 수 있다면, 그리고 지주회사 제도의 완화와 각종 경영권 보장제도의 도입 등이 투명성 확보의 조건을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재벌계 대기업들로 하여금 복지국가 창조에 크게 도움이 도움이 되도록 유도할 수 있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수용해야 한다.

(출자총액제한제를 포함한 공정거래법상 재벌관련 규제의 대폭 폐지와 동시에 상법/회사법상 콘쩨른 법의 도입을 통한 재벌개혁에 대해서는 필자가 공동저자로 참여한 "복지국가 혁명"[도서출판 민, 2007/7]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논쟁은 결국 가치관과 세계관의 문제, 이념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투명성 그 자체가 궁극적 가치인지 아니면 복지국가가 가치인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투명한 자본주의, 정상적 자본주의가 진보적 가치라는 착각과 미몽에서 깨어나야 하며, 국민들 대다수에게 행복하고 풍요로우며 개성있는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궁극적인 진보적 가치로서 부활되어야 한다.


선 복지혜택 확충, 후 조세개혁의 원칙

우리 국민들은 복지국가의 맛을 본 적이 없다. 따라서 먼저 국가의 복지혜택이 개개인의 인생을 얼마나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드는지 감격적 체험을 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당장이라도 그런 복지국가를 만들기에 우리의 국가재정은 충분하다.

극빈층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이 한번도 국가의 복지혜택을 받아본 적 없기 때문에, 복지국가 하면 ‘세금 더 걷자는 거냐’ 하면서 반발만 하는 것이다. 경험이 없는 까닭에 국가권력과 정치권이 아무리 미래복지를 약속하더라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국민적 반발은 자연스럽다.

이를 고려할 때 반드시 선 복지혜택 제공, 후 조세부담 확대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먼저 민주주의 국가가 매우 질 높은 복지혜택을 제공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아주 유익하고 반가운 혜택이라는 것을 국민들이 수년간 체험해야 한다. 1년으로 부족하고 3~4년 정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국민들에게 “이렇게 좋은 복지국가의 지속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증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눈물로 호소하며 국민들에게 조세개혁에 대한 동의를 구해야 한다.

이때 ‘균형재정’의 원칙은 잠시 유보될 필요가 있다. 주류 경제학자들과 재경부, 기획예산처 관료들은 마치 적자재정이 되면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데, 우리 국가재정이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양호한 까닭에 몇 년 정도는 적자재정으로 가도 별 문제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복지국가는 퍼주기식 복지가 아니라 - 물론 노인과 아동 등을 위해서는 퍼주기식 복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등을 통해 경제성장으로 선순환되는 복지이기 때문에 결국은 조세수입이 증가하여 균형재정을 회복할 수 있다.

선진국들도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 먼저 복지에 대한 예산을 급격히 확충했다. 대공황이 낳은 대량실업과 삶의 파괴는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40년대와 50년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조세를 늘려나갔다. 우리나라도 1997년 금융위기시 정부가 공적자금 150조를 퍼부었던 적이 있다. 지금 국민들의 2/3가 느끼는 삶의 위기는 97년 금융위기에 버금가며 따라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라면 재정적자를 걱정하면서 주저할 것이 아니라 100조 이상의 국가예산을 시급한 복지의 확충에 과감하게 쏟아부어야 한다. 먼저 복지혜택을 과감히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길은 국민 2/3의 지지를 받고 있다.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60% 이상이 세금을 더 내더라도 복지혜택이 큰 유럽식 복지국가모델을 선호하고 있다. 먼저 세금부터 더 내라는 노무현식 복지혁명이 아니라, 먼저 국민들에게 복지혜택부터 대폭 제공하고 나중에 국민들에게 증세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방식의 복지국가혁명이라면 대다수 국민이 적극적으로 찬성할 것이다.


중산층을 포함한 보편주의 복지국가로

사회복지가 단지 경제적 약자에 대한 시혜적, 선택적 복지여서는 안되며 중간층을 포함하는 보편주의적 복지가 될 때만이 비로소 조세개혁에 대한 중간층의 반발을 극복할 수 있다. 즉 월급생활자 등 중간층에게서는 세금만 뜯어내려 하고 그들에게 아무런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 복지국가, 가난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삼는 전통적 복지국가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시 말하면 중산층이 복지국가의 맛을 제대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가 선별적 복지, 즉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한 복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중산층을 포함한 모두가 혜택을 누리는 보편주의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

월급쟁이들과 구멍가게, 통탉집 주인들이 고민하는 자식들 교육 걱정, 노후대비, 의료비 걱정, 주택걱정 등의 문제를 국가적 복지체제를 통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들의 고민은 동시에 저소득층의 고민이기도 하기에 이를 해결하면 우리 국민 90% 이상의 고민을 해결하는 셈이다.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우리나라의 발전단계로 볼 때, 바야흐로 복지를 혁명적으로 확대할 시점에 도달했다. 앞으로 몇년간은 그야말로 폭우가 내리붓듯이,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이, 급격하게 국가의 복지지출을 늘려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시 움직이자

복지국가 혁명을 대통령과 국회의원 몇 명이 시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정책과 슬로건, 미래비전을 가지고 움직이는 수십만, 수백만 명의 사회운동과 정책정당운동이 필요하다. 이들이 수천만 국민들을 감동시켜나가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도 중요하지만 국회와 정당 그리고 시민사회까지 하나의 동일한 미래비전과 전략을 가지고 집권해야 하며, 탁월한 한 사람에게 모두 맡기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1980년대에 ‘의식화’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정치적 독재와 정치군사적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정신을 계몽하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찾아온 경제적 자유주의화, 그 결과인 금융자산 계급의 등장과 금융자본의 지구적 지배의 시대를 맞아 그 의식화의 약발이 이제 다 떨어졌다. 오늘날 과거의 민주화 세력은 가치판단의 기준을 잃었고, 방향과 실질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다.

방향상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제 (신)자유주의의 이념 공세에 맞서 복지국가 혁명의 정신을 계몽하는 제2의 의식화운동이 필요하다. 투명성을 가면으로 내걸고 투기화되는 금융자본, 펀드자본의 전일적 지배에 맞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가진 역사적 긍정성 즉 그 생산적 능력과 설비투자, 기술혁신을 옹호하고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자본주의의 건강성과 긍정성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자본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과 함께 복지국가 혁명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여야 한다.

진보정당들과 시민단체들마저 복지국가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지 않을 정도로 복지국가 사상의 불모지인 한국 땅에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정신을 계몽하는 새로운 계몽운동이 필요하다.

신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선진화 혁명’에 대항해서 ‘복지국가 혁명’이라는 새로운 거대담론을 내세워야 한다. ‘미국형 선진화’(자유주의)에 맞서는 ‘북유럽형 선진화’(사회민주주의)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이 두 개의 선진화 길을 놓고 치열한 이념논쟁과 거대담론 논쟁, 가치관과 세계관의 논쟁을 벌여 나가야 한다.


(필자의 견해에 대해 더 관심 있는 분들은 필자도 참여하여 공동 집필한 "복지국가 혁명"[도서출판 민, 2007년 7월 발행]을 읽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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