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로케이션:::서로 길목이 되어라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이유가 저들-극우수구세력들-의 아이돌이어서일까요? 아니요. 그만큼 쥐고 흔들기 만만한 상대기 때문입니다. 비리도 많고, 욕심도 많고, 정치는 잘 모르는데 나대기는 좋아하고, 무식해서 시키면 앞뒤 안 가리는 돌격대원 스타일이라서 간택된 겁니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간택될 때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정경유착이 얽혀있었습니다. 오죽하면 드라마 프로덕션의 대표도 그 줄에 서면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까, 아님 불이익이라도 당하지 않으려고 띠 두르고 선거운동에 나설 정도였습니다. 쥐새끼가 왜 죽어라 민영화를 외치겠습니까? 다 정경유착의 이해관계, 조중동의 요청에 충실하려면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05/14 아인슈타인의 왜 사회주의인가?
  2. 2007/07/14 사회주의?
  3. 2007/07/14 통일과 헨리 조지

이 글은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1949년 5월 미국의 독립계 좌파 월간지 먼슬리리뷰 창간호에 쓴 것이며, 이 잡지는 창간특집호에 이 글을 종종 다시 싣습니다.



왜 사회주의인가? (WHY SOCIALISM?)

알버트 아인슈타인 (by Albert Einstein)


경제나 사회 문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해도 되는 걸까? 나는 몇 가지 이유로 그렇다고 믿는다.

Is it advisable for one who is not an expert on economic and social issues to express views on the subject of socialism? I believe for a number of reasons that it is.

먼저 과학적 지식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방법론상으로 천문학과 경제학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두 분야의 학자들은 모두 많은 현상들의 관계를 가능한 한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현상들의 일반적인 법칙을 찾으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방법론 차이가 분명히 있다. 경제학에서 일반 법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따로 떼어내서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많은 요인들이 경제 현상들에 종종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른바 인류의 문명사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은, 잘 알려진 대로 본질적으로 경제적이지 않은 원인의 영향을 받았고 또 이것의 제약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역사상 대부분의 나라들은 정복 덕분에 존재했다. 정복하는 이들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점령지에서 특권층이 됐다. 그들은 땅 소유권을 독점했고 자기 계급 사람을 성직자로 임명했다. 교육을 통제한 성직자들은 계급 구별을 영원한 제도로 정착시켰고 사람들이 사회행동을 할 때 (상당 부분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되는 가치체계를 창조했다.

Let us first consider the question from the point of view of scientific knowledge. It might appear that there are no essential methodological differences between astronomy and economics: scientists in both fields attempt to discover laws of general acceptability for a circumscribed group of phenomena in order to make the interconnection of these phenomena as clearly understandable as possible. But in reality such methodological differences do exist. The discovery of general laws in the field of economics is made difficult by the circumstance that observed economic phenomena are often affected by many factors which are very hard to evaluate separately. In addition, the experience which has accumulat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so-called civilized period of human history has--as is well known--been largely influenced and limited by causes which are by no means exclusively economic in nature. For example, most of the major states of history owed their existence to conquest. The conquering peoples established themselves, legally and economically, as the privileged class of the conquered country. They seized for themselves a monopoly of the land ownership and appointed a priesthood from among their own ranks. The priests, in control of education, made the class division of society into a permanent institution and created a system of values by which the people were thenceforth, to a large extent unconsciously, guided in their social behavior.

그러나 말하자면 역사적 전통은 과거의 이야기다. 토르스테인 베블린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라고 부른 것을 우리는 진정으로 넘어서지 못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경제적 사실들은 이 단계에 속한다. 또 여기서 추출한 법칙을 다른 단계에 적용할 수도 없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를 극복하고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 단계 경제학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빛을 제시하기 어렵다.

But historic tradition is, so to speak, of yesterday; nowhere have we really overcome what Thorstein Veblen called "the predatory phase" of human development. The observable economic facts belong to that phase and even such laws as we can derive from them are not applicable to other phases. Since the real purpose of socialism is precisely to overcome and advance beyond the predatory phase of human development, economic science in its present state can throw little light on the socialist society of the future.

둘째로, 사회주의는 사회윤리적 목적을 향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목적을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을 사람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더군다나 못한다. 기껏해야 과학은 이런 목적을 이루는 도구를 제시할 뿐이다. 목적을 인식하는 것은 높은 윤리적 이상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 목표가 사산한 것이 아니라 활력 있는 것이라면 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것은 사회의 점진적인 진화를 결정하는 많은 사람들이다.

Second, socialism is directed towards a social-ethical end. Science, however, cannot create ends and, even less, instill them in human beings; science, at most, can supply the means by which to attain certain ends. But the ends themselves are conceived by personalities with lofty ethical ideals and--if these ends are not stillborn, but vital and vigorous--are adopted and carried forward by those many human beings who, half unconsciously, determine the slow evolution of society.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사람 문제에 관한 한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또 우리는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의사 표시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문가들뿐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인간 사회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안정성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수없이 많다. 개인들이 크든 작든 자신 스스로가 소속된 집단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이런 상황의 특징이다. 내가 말하는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한다. 나는 최근에 지식인이며 인격자인 사람과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다시 전쟁이 난다면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돼, 초국가 조직만이 이런 위험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내 손님은 냉철하게 말했다. "인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반대하십니까?"

For these reasons, we should be on our guard not to overestimate science and scientific methods when it is a question of human problems; and we should not assume that experts are the only ones who have a right to express themselves on questions affecting the organization of society. Innumerable voices have been asserting for some time now that human society is passing through a crisis, that its stability has been gravely shattered. It is characteristic of such a situation that individuals feel indifferent or even hostile toward the group, small or large, to which they belong. In order to illustrate my meaning, let me record here a personal experience. I recently discussed with an intelligent and well-disposed man the threat of another war, which in my opinion would seriously endanger the existence of mankind, and I remarked that only a supra-national organization would offer protection from that danger. Thereupon my visitor, very calmly and coolly, said to me: "Why are you so deeply opposed to the disappearance of the human race?"

한 세기 전만 해도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이들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발언은 자신의 평정을 찾는 데 실패하고 성공에 대한 희망조차 잃어버린 이들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스런 고독과 고립의 표현인데, 요즘 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 원인이 뭘까? 탈출구는 있는가?

I am sure that as little as a century ago no one would have so lightly made a statement of this kind. It is the statement of a man who has striven in vain to attain an equilibrium within himself and has more or less lost hope of succeeding. It is the expression of a painful solitude and isolation from which so many people are suffering in these days. What is the cause? Is there a way out?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는 쉽지만 어느 정도라도 확실한 답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볼 작정이다. 물론 나는 우리의 감정과 시도가 종종 서로 모순되고 모호하며 그래서 쉽고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It is easy to raise such questions, but difficult to answer them with any degree of assurance. I must try, however, as best I can, although I am very conscious of the fact that our feelings and strivings are often contradictory and obscure and that they cannot be expressed in easy and simple formulas.

사람은 언제나 고독한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사람은 자신과 자기 주변 인물들의 존재를 지키려고 하고, 개인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며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려고 한다. 사회적 존재로서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평가받고 사랑을 받으려 하며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려고 한다. 종종 모순적인 이런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만이 사람의 특징을 설명한다. 또 사람의 심리적 평정은 이 두 가지 유형의 노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 노력은 사회의 복지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고독한 존재라는 측면과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 가운데 어느 면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느냐는 주로 유전에 의해 결정될 여지가 크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개성은 대개 그가 자란 환경과 사회 구조, 그 사회의 전통, 그리고 특정 행위들에 대한 그 사회의 평가에 따라 형성된다. 개인에게 "사회"의 추상적 개념은, 자신의 동시대인 및 이전 세대 사람 전체와 맺는 직접, 간접적인 관계의 합이다. 개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노력하고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지적이며 감성적인 존재로서 개인은 또한 많은 부분을 사회에 의존한다. 그래서 사회의 틀 밖에서 사람을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에게 음식, 옷, 집, 도구, 언어, 생각의 형태, 생각의 내용 대부분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사회"이다. 사람이 생을 유지하는 것은 "사회"라는 간단한 단어 뒤에 숨어있는 현재와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일과 성과 덕분이다.

Man is, at one and the same time, a solitary being and a social being. As a solitary being, he attempts to protect his own existence and that of those who are closest to him, to satisfy his personal desires, and to develop his innate abilities. As a social being, he seeks to gain the recognition and affection of his fellow human beings, to share in their pleasures, to comfort them in their sorrows, and to improve their conditions of life. Only the existence of these varied, frequently conflicting, strivings accounts for the special character of a man, and their specific combination determines the extent to which an individual can achieve an inner equilibrium and can contribute to the well-being of society. It is quite possible that the relative strength of these two drives is, in the main, fixed by inheritance. But the personality that finally emerges is largely formed by the environment in which a man happens to find himself during his development, by the structure of the society in which he grows up, by the tradition of that society, and by its appraisal of particular types of behavior. The abstract concept "society" means to the individual human being the sum total of his direct and indirect relations to his contemporaries and to all the people of earlier generations. The individual is able to think, feel, strive, and work by himself; but he depends so much upon society--in his physical, intellectual, and emotional existence--that it is impossible to think of him, or to understand him, outside the framework of society. It is "society" which provides man with food, clothing, a home, the tools of work, language, the forms of thought, and most of the content of thought; his life is made possible through the labor and the accomplishments of the many millions past and present who are all hidden behind the small word "society."

그래서 명백한 사실은, 개인이 사회에 의존하는 것이 개미나 벌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 없는 본성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미와 벌의 삶 전체가 세세한 부분까지 유전적 본능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인간 사회의 형태와 상호관계는 아주 다양하며 변화할 수 있다. 기억, 새로운 조합을 할 수 있는 능력, 언어라는 선물이, 사람에게 생물적 요구와 무관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발전은 전통, 조직, 문학, 과학기술적 성과, 예술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에 의식적인 생각과 요구가 개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준다.

It is evident, therefore, that the dependence of the individual upon society is a fact of nature which cannot be abolished--just as in the case of ants and bees. However, while the whole life process of ants and bees is fixed down to the smallest detail by rigid, hereditary instincts, the social pattern and interrelationships of human beings are very variable and susceptible to change. Memory, the capacity to make new combinations, the gift of oral communication have made possible developments among human being which are not dictated by biological necessities. Such developments manifest themselves in traditions, institutions, and organizations; in literature; in scientific and engineering accomplishments; in works of art. This explains how it happens that, in a certain sense, man can influence his life through his own conduct, and that in this process conscious thinking and wanting can play a part.

사람은 유전을 통해 태어날 때 생물학적 특성을 갖춘다. 여기에는 인류를 특징짓는 자연적인 요청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이를 고정되고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사람은 사는 동안 의사소통을 비롯한 다양한 통로를 통해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특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화적 특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수 있는 것인 동시에, 상당한 정도까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현대 인류학의 원시문화 비교연구 덕분에 우리는 사람의 사회적 행위가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적 유형, 조직 형태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됐다. 사람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은 인류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서로를 멸망시키거나 잔인한 자기 파괴적인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저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Man acquires at birth, through heredity, a biological constitution which we must consider fixed and unalterable, including the natural urges which are characteristic of the human species. In addition, during his lifetime, he acquires a cultural constitution which he adopts from society through communication and through many other types of influences. It is this cultural constitution which, with the passage of time, is subject to change and which determines to a very large exten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individual and society. Modern anthropology has taught us, through comparative investigation of so-called primitive cultures, that the social behavior of human beings may differ greatly, depending upon prevailing cultural patterns and the types of organization which predominate in society. It is on this that those who are striving to improve the lot of man may ground their hopes: human beings are not condemned, because of their biological constitution, to annihilate each other or to be at the mercy of a cruel, self-inflicted fate.

인간의 삶을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 사회구조와 문화적 태도를 어떻게 바꿔야하는가 하고 자문할 때는, 사람이 바꿀 수 없는 특정한 조건이 있다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생물학적 본성은 바꿀 수 없다. 게다가 지난 몇 세기동안 이룩한 기술적, 인류통계적 발전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노동과 고도로 중앙집중적인 생산 설비의 극단적인 분리는 전적으로 피할 수 없다.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자급자족할 수 있던 목가적인 시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인류가 생산과 소비의 지구촌을 구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과장된 이야기일 뿐이다.

If we ask ourselves how the structure of society and the cultural attitude of man should be changed in order to make human life as satisfying as possible, we should constantly be conscious of the fact that there are certain conditions which we are unable to modify. As mentioned before, the biological nature of man is, for all practical purposes, not subject to change. Furthermore, technological and demographic developments of the last few centuries have created conditions which are here to stay. In relatively densely settled populations with the goods which are indispensable to their continued existence, an extreme division of labor and a highly-centralized productive apparatus are absolutely necessary. The time--which, looking back, seems so idyllic--is gone forever when individuals or relatively small groups could be completely self-sufficient. It is only a slight exaggeration to say that mankind constitutes even now a planetary community of production and consumption.

나는 이제 우리 시대 위기의 본질을 간략하게 지적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사회에 의존한다는 점을 어느 때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됐다. 그러나 개인은 이 의존성을 긍정적인 자산이며 유기적 연관이며 보호해주는 힘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연적인 권리,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다. 게다가, 개인적인 욕구는 갈수록 강조되는 반면 원래 이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욕구는 갈수록 황폐해지는 상황이다.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은 이런 황폐화에 시달리고 있다. 이기주의의 포로가 된 인간은 불안해지고 외로우며, 순진하고 단순하며 세련되지 못한 삶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면 사회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비록 이 의미가 짧고 위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I have now reached the point where I may indicate briefly what to me constitutes the essence of the crisis of our time. It concerns the relationship of the individual to society. The individual has become more conscious than ever of his dependence upon society. But he does not experience this dependence as a positive asset, as an organic tie, as a protective force, but rather as a threat to his natural rights, or even to his economic existence. Moreover, his position in society is such that the egotistical drives of his make-up are constantly being accentuated, while his social drives, which are by nature weaker, progressively deteriorate. All human beings, whatever their position in society, are suffering from this process of deterioration. Unknowingly prisoners of their own egotism, they feel insecure, lonely, and deprived of the naive, simple, and unsophisticated enjoyment of life. Man can find meaning in life, short and perilous as it is, only through devoting himself to society.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앞에는 큰 생산자 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총체적인 노동의 과실을 강제가 아니라 법적으로 확립된 규칙에 충실해서 빼앗아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산 수단 곧 추가적인 자본재 뿐 아니라 소비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총체적인 생산능력은 대부분 합법적으로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The economic anarchy of capitalist society as it exists today is, in my opinion, the real source of the evil. We see before us a huge community of producers, the members of which are unceasingly striving to deprive each other of the fruits of their collective labor--not by force, but on the whole in faithful compliance with legally established rules. In this respect, it is important to realize that the means of production--that is to say, the entire productive capacity that is needed for producing consumer goods as well as additional capital goods--may legally be, and for the most part are, the private property of individuals.

단순화를 위해 앞으로 나는 생산수단을 나눠 갖지 못한 이들을 "노동자"라고 부르겠다. 이것이 일반적인 용어사용법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는 위치에 있다. 생산수단을 사용해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재산이 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점은 실질 가치로 따진 상품과 임금의 관계다. 노동계약이 "자유롭게" 이뤄지는 한, 노동자가 받는 것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실질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최소한의 필요와 자본가의 노동력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 숫자와 관련된다. 이론적으로도 임금은 생산한 것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은 꼭 이해해야 한다. (자유 경쟁시장에서는 임금도 일반적인 상품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 번역자)

For the sake of simplicity, in the discussion that follows I shall call "workers" all those who do not share in the ownership of the means of production--although this does not quite correspond to the customary use of the term. The owner of the means of production is in a position to purchase the labor power of the worker. By using the means of production, the worker produces new goods which become the property of the capitalist. The essential point about this process is the relation between what the worker produces and what he is paid, both measured in terms of real value. Insofar as the labor contract is "free," what the worker receives is determined not by the real value of the goods he produces, but by his minimum needs and by the capitalists' requirements for labor power in relation to the number of workers competing for jobs.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that even in theory the payment of the worker is not determined by the value of his product.

사적인 자본은 소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가들의 경쟁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갈수록 심해지는 노동의 분리와 기술개발이 적은 비용으로도 더 많은 생산단위를 만들도록 유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발전의 결과는 사적 자본의 과두정치(독재정치)다. 이는 민주적인 정치사회에서조차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이다. 실질적인 목적 때문에 유권자를 입법부에서 분리시킨 사적 자본가들의 재정지원을 받거나 영향을 받는 정당이 의회를 구성하게 된 이래로 이는 명백한 진실이다. 이 결과는 시민의 대표가 특권 없는 다수의 이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현재의 조건에서는 사적 자본가들이 피치 못하게 주요 정보원(언론, 라디오, 교육 등)을 직접, 간접적으로 지배한다. 그래서 시민 각자가 객관적인 결론을 얻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현명하게 활용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Private capital tends to become concentrated in few hands, partly because of competition among the capitalists, and partly because technological development and the increasing division of labor encourage the formation of larger units of production at the expense of the smaller ones. The result of these developments is an oligarchy of private capital, the enormous power of which cannot be effectively checked even by a democratically organized political society. This is true since the members of legislative bodies are selected by political parties, largely financed or otherwise influenced by private capitalists who, for all practical purposes, separate the electorate from the legislature. The consequence is that the representatives of the people do not in fact sufficiently protect the interests of the underprivileged sections of the population. Moreover, under existing conditions, private capitalists inevitably control, directly or indirectly, the main sources of information (press, radio, education). It is thus extremely difficult, and indeed in most cases quite impossible, for the individual citizen to come to objective conclusions and to make intelligent use of his political rights.

자본의 사적인 소유에 기초한 경제가 지배하는 상황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로 생산수단(자본)을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며 소유자는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분한다. 둘째로, 노동계약은 자유롭게 이뤄진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는 없다. 특히 오랜 힘겨운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조금은 개선된 "자유 노동계약"을 특정한 노동자 집단에 적용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현재 경제는 "순수한"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The situation prevailing in an economy based on the private ownership of capital is thus characterized by two main principles: first, means of production (capital) are privately owned and the owners dispose of them as they see fit; second, the labor contract is free. Of course, there is no such thing as a pure capitalist society in this sense. In particular, it should be noted that the workers, through long and bitter political struggles, have succeeded in securing a somewhat improved form of the "free labor contract" for certain categories of workers. But taken as a whole, the present day economy does not differ much from "pure" capitalism.

생산은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내기 위해 이뤄진다. 일할 능력이 있고 의사도 있는 사람이 모두 일자리를 얻는 장치는 없다. "실업자 군대"는 언제나 존재한다. 노동자는 상시적으로 실업을 걱정한다. 실업자나 저임 노동자는 이익을 내는 시장을 형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비재 생산은 제한되고 그 결과는 엄청난 곤궁이다. (물건을 살 능력이 없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자본가는 생산을 줄이고, 이는 또 다시 가난한 이들이 물건을 사기 어렵게 만든다는 뜻: 번역자) 기술 진보는 노동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업만 증가시키는 결과를 종종 낳는다. 자본가들의 경쟁과 연관된 이윤 동기야말로, 자본 축적과 활용의 불안정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심각한 경기 침체의 원흉이다. 무한 경쟁은 노동의 엄청난 낭비를 유발하며, 내가 위에서 언급한 개인들의 사회의식을 불구로 만든다.

Production is carried on for profit, not for use. There is no provision that all those able and willing to work will always be in a position to find employment; an "army of unemployed" almost always exists. The worker is constantly in fear of losing his job. Since unemployed and poorly paid workers do not provide a profitable market, the production of consumers' goods is restricted, and great hardship is the consequence. Technological progress frequently results in more unemployment rather than in an easing of the burden of work for all. The profit motive, in conjunction with competition among capitalists, is responsible for an instability in the accumulation and utilization of capital which leads to increasingly severe depressions. Unlimited competition leads to a huge waste of labor, and to that crippling of the social consciousness of individuals which I mentioned before.

개인을 불구로 만드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최대 악이다. 이 악 때문에 우리의 교육체계 전반이 고통을 겪고 있다. 과장된 경쟁을 벌이는 태도가 학생들에게 주입됐고, 그래서 학생들은 미래 직업을 위한 성공을 숭배하게 됐다.

This crippling of individuals I consider the worst evil of capitalism. Our whole educational system suffers from this evil. An exaggerated competitive attitude is inculcated into the student, who is trained to worship acquisitive success as a preparation for his future career.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소유하며 계획된 방식으로 이를 활용한다. 생산을 사회의 필요에 맞추는 계획경제는 일감을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분배할 것이고 모든 사람(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에게 생활을 보장할 것이다. 개인의 교육은, 현재 우리 사회의 힘과 성공을 칭송하는 대신에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신장하고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을 자신 속에 심으려 시도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I am convinced there is only one way to eliminate these grave evils, namely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a socialist economy, accompanied by an educational system which would be oriented toward social goals. In such an economy, the means of production are owned by society itself and are utilized in a planned fashion. A planned economy, which adjusts production to the needs of the community, would distribute the work to be done among all those able to work and would guarantee a livelihood to every man, woman, and child. The education of the individual, in addition to promoting his own innate abilities, would attempt to develop in him a sense of responsibility for his fellow men, in place of the glorification of power and success in our present society.

그럼에도, 계획 경제가 아직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식의 계획경제는 개인을 완전히 노예화함으로써도 달성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달성하려면 아주 극도로 어려운 사회-정치적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 문제란, 정치, 경제적 힘의 광범한 중앙집중화를 고려할 때, 관료들이 모든 힘을 장악하고 자만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료의 권력에 맞서는 민주적인 평형추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Nevertheless, it is necessary to remember that a planned economy is not yet socialism. A planned economy as such may be accompanied by the complete enslavement of the individual. The achievement of socialism requires the solution of some extremely difficult socio-political problems: how is it possible, in view of the far-reaching centralization of political and economic power, to prevent bureaucracy from becoming all-powerful and overweening? How can the rights of the individual be protected and therewith a democratic counterweight to the power of bureaucracy be assured?

사회주의의 목표와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지금 이행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먼슬리리뷰 = 옮긴이)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Clarity about the aims and problems of socialism is of greatest significance in our age of transition. Since, under present circumstances, free and unhindered discussion of these problems has come under a powerful taboo, I consider the foundation of this magazine to be an important public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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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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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영구 2003-11-02 23:33:23, Hit : 79
Subject   사회주의?
번호 : 43553
글쓴날 : 2003-10-31 12:46:16  
글쓴이 : 허영구 조회 : 72  
제목: 사회주의?


사회주의?

10.29 부동산대책으로 강남거래는 '전멸상태'라고 한다. 부동산관련업자들은 때아니게 문을 닫고 가을 단풍놀이를 떠났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저항 한 번 없이 흩어졌던 이라크 공화국수비대처럼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는 모습이다. 다주택 소유자들에 대한 양도세를 최고 82.5%까지 중과세하면 거래가 중단되어 오히려 전세값을 끌어올려 서민들만 피해를 입게 된다고 말한다. 양도차익에 대해 세금을 무겁게 물림으로써 투기거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의지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사회에서 투기(speculation)와 투자(investment)를 구분한다는 매우 어렵고 어쩌면 그런 가장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고위관료들의 40%가 강남에 살고 있다는 마당에 자신들의 살을 깎아 내는 정책을 펼 리도 만무하고 자본주의 사적소유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불충한 행동은 어림없는 일이다. 재경부장관은 지금의 정책에서 더 이상(거래허가제등)의 대책을 요구한다면 '사회주의'라고 말했다.

사회주의식으로 개인의 주택소유를 제한할 수 없다는 그럴듯한 주장을 통해 근본적인 주택정책, 토지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이념적 공세로 잠재우려 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색깔공세다. 우리나라의 헌법은 자본주의의 근간인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데 사적소유인 개인의 재산조차도 공공의 목적으로 제한을 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과 사회주의요소가 가미되어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론적으로 순수한 자본주의는 완전히 시장에 맡겨져야 하는 데 지구상에 그런 자본주의는 없다.

오직 국방이나 치안정도를 담당하는 '야경국가'일 뿐이다. 만약 재경부장관의 논리대로 사회주의 운운한다면 자본주의 방식으로 부동산 문제를 완전히 자유시장에 맡기고 국가가 별도의 경제정책을 수립하거나 기획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재정경제부 같은 부처도 폐지되어야 한다. 그 동안 숱한 부동산투기 대책이니 집 값 안정 대책이니 하면서 거기다 '종합', '발본색원' 등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정책을 남발하였지만 해결된 부동산문제가 무엇인가? 그 때의 실무자들이 지금 부처의 수장이 되었으니 사탕발림이나 눈가림으로 끝나고 말일이다.

일시적으로 관망하던 부동산투기자금은 다시 부동산시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왜냐면 수 백조 원의 부동자금이 구름처럼 몰려다니는 땅에서 그것이 모두 주식이나 채권시장 그리고 직접투자 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어차피 부동산이라는 황금의 알을 낳는 거위를 찾아들 것이다. 우리는 지난 시기 중과세니 강력한 세금제도를 통해서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투기를 잡겠다고 했던 역대정권의 경제정책을 믿을 수 없다. 부동산거래에 중과세를 하더라도 그것을 감안하여 부동산 가격이 인상된 상태에서 거래될 것이고 세금 제대로 내는 투기꾼이 어디 있으며 정부는 정말로 세금을 제대로 거두겠다는 의지가 있는지 묻고 싶다.

김진표부총리가 스스로 사회주의의 경계는 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번의 정책이 토지공개념을 포함 한 것이라고 말했고 이에 대해 자본언론들은 토지공개념을 거론한 것 자체가 사회주의를 하겠다는 으름장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산업자본주의 초기 자본가들이 하늘이 내린 자연인 토지를 무단으로 소유한 지주들이 놀고 먹으면서 지대를 받아가자 기업경영의 생산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토지국유 즉 토지공개념을 주장한 것이 자본주의 역사의 유래인데 그것을 사회주의사상으로 몰아가는 잘못이다. 그러다 자본가들은 토지국유화가 되면 노동자들이 공장도 국유화하자고 주장할까봐 슬그머니 토지국유화 주장을 폐기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힘을 키운 자본가들은 이제 스스로 부동산을 소유하기 시작했고 토지의 사유화는 일반화되었다. 토지의 사유화가 어려우면 자본주의 국가권력의 힘을 동원하여 개인이 가지고 있는 토지에 수용권을 발동하여 자본에게 몰아주기 일쑤다. 그런 면에서 보면 초기 자본가들이 주장했던 토지 공개념의 목적은 내용적으로 달성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자본 스스로 토지를 소유하면서 생산의 목적만이 아니라 재산을 증식하는 수단으로 활용해 오면서 지주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자본이 우려하는 토지공개념은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를 원래의 주인인 노동자, 서민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제 주택문제로 돌아와서 정부가 조세정책으로 집 값을 안정시키고 진정으로 집 없는 서민들의 주거공간을 마련하려 한다면 실효성 없는 강남 일부의 부동산 투기대책이 아니라 국토와 모든 주택에 대한 부동산대책인 사적소유에 대한 보유세를 혁명적으로 강화시키는 일이다. 혁명이라면 또 사회주의로 몰고 싶겠지만 수억짜리 집을 소유했어도 일년 세금이 몇 만원에 불과한 한국과 수백만원인 미국을 비교하면 사회주의 색깔 공세는 없어질 것 아닌가? 미국이라면 간, 쓸개 다 내주는 잘난 사람들이 왜 그런 문제는 피하는지 모를 일이다.

정부가 말하는 10년간 300만호 건설로 주택공급을 늘려 주택보급율을 115%로 하여 주택가격을 안정시킨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더라도 이 엄청난 가격의 아파트를 집 없는 서민들이 갖기는 쉽지 않다. 가격을 원천적으로 낮추는 일, 그것은 토지의 공개념 도입과 그것의 실천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서민임대주택을 대대적으로 건설해 나가야 한다. 부동산논쟁과 관련하여 사회주의 운운하는 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투기꾼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부동산 투기업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투기를 일삼아 온 관료, 정치인 그리고 재벌까지 포함한다. 당신들이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시장자본주의를 외치려면 자본가들의 선조들이 외쳤던 토지국유화를 주장하라! 그것은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본주의자가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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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헨리 조지의 기독교 사상(5)
통일과 헨리 조지

박창수(성경적토지정의를위한모임 전임연구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는 헨리 조지와 쑨원의 사상

헨리 조지는 대표작 『진보와 빈곤』(1879)의 서문에서, 자신의 견해는 “스미스-리카도 학파가 인식한 진리를 프루동-라쌀레 학파가 인식한 진리에 통합시켜 주며, (진정한 의미의) 자유방임이 사회주의의 숭고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고 밝힌 바 있다. 곧 헨리 조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발전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제3의 체제를 주장한 것이다.

헨리 조지는 사회주의의 이상은 위대하고 숭고하며, 실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는 인위적으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성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사회는 유기체이지 기계가 아니라고 보았다.

“사회주의는 우리 문명의 폐단이 자연스러운 관계의 부적절성 내지 부조화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이를 인위적으로 조직화하고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산업 관계를 의도적으로 조직화하는 책임, 마치 거대한 기계―수많은 부품을 가지고서 인간의 지시에 따라 적절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제조하는 것과 같은 책임을 국가에 지운다.”(노동자의 상태)

헨리 조지는 사회적·산업적 관계를 인간의 몸에 비유하였다. “신체라는 유기체와 사회라는 유기체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면, 국가의 고유 기능과 인간 신체에서 의식적인 지능이 담당하는 기능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면, 개인의 충동 및 이해관계의 작용과 인간 신체의 무의식적인 본능 및 비의지적 동작이 하는 기능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면, 무정부주의자들은 머리 없이 살아나가려는 사람과 같고 사회주의자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섬세한 신체 내부의 여러 관계를 의식에 의해 지배하려는 사람과 같다고 하겠다.”(노동자의 상태).

나아가 헨리 조지는 모든 유형의 사회주의가 문제를 뿌리까지 파고드는 근원적인 대책이 결여된 단점이 있다고 혹평하였다. “사회주의는 임금이 최저한으로 내려가는 경향을 자연법칙이라고 생각하여 임금을 철폐하려고 한다. 사회주의는 경쟁의 자연스러운 결과에 의해 노동자가 몰락한다고 생각하여 경쟁을 철폐하고 규제, 금지, 정부권력 확대를 시도한다. 이렇게 사회주의는 결과를 원인이라고 착각하고 어린애처럼 돌에 부딪혔다고 돌을 나무라며 효과 없는 대책을 추구하느라 힘을 낭비한다. 사회주의가 여러 나라에서 민주적 열망과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왕을 요구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망상이다. 사회주의는 여러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망치고 군주를 강화시켜 주고 있는 망상이고, 국민 위의 권력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하는 망상이며, 개인의 일을 각자가 처리하는 것보다 더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하는 망상이다.”(노동자의 상태).

또한 헨리 조지는 사회주의는 원인을 찾는 노력이 없이 결론으로 비약한다고 비판하였다. “사회주의는, 노동에 대한 압박은 자본의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토지에서 분리함으로써 노동에서 자본을 박탈하는 잘못에서 나온다는 점을 모른다. 그 때문에 자본화된 독점이 문제인데도 마치 자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사회주의는, 노동이 생산의 천연 원료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면 자본이 노동을 압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또 임금제도 그 자체는 상호 편의에서 비롯되며 당사자 중 한 쪽이 불확실한 수입보다는 안정된 수입을 원하는 경우의 서로 협동하는 한 방식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사회주의는, 소위 “임금 철칙”은 임금의 자연법칙이 아니라 단지 생활과 일에 필요한 물질이 박탈됨으로써 무기력하게 된 부자연스러운 상황에서의 임금법칙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사회주의가 경쟁의 폐단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제한된 경쟁의 폐단이며 이는 사람이 토지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당하는 일방적인 경쟁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사회주의의 방법 즉 사람들을 산업군대로 조직화하고 모든 생산과 교환을 정부 내지 준정부의 관료가 지시 통제하는 방법은, 만일 완벽하게 실시된다면, 마치 이집트 전제정치와 같은 사회를 초래하고 만다.”(노동자의 상태).

동시에 헨리 조지는, 개인주의와 구분되는 사회주의에는 나름대로의 의심할 수 없는 진리가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특히 자유 무역론자들이 너무 주목을 하지 않아 왔다고 비판하였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개별적인 존재이다. 별도의 개체로서 욕구와 능력 면에서 타인과 다르며 능력을 발휘하거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노력과 자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도 해서 타인의 욕구와 조화되는 욕구도 있고 타인과의 협력을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그러므로 개인의 영역과 함께 사회의 영역도 존재하는 것이다. 각자 알아서 해야 잘 되는 일이 있고 사회가 모든 구성원을 위해 나서야 잘 되는 일이 있다.” (보호냐 자유무역이냐).

이어서 헨리 조지는 진보하는 문명의 자연적 경향은 사회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해 왔으며, 사회의 성장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 사회의 영역으로 이전된 기능을 여전히 개인에게 맡겨둠으로써 발생하는 문제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노동생산물인 자본에 대한 사유(私有)를 적극 옹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신과 철도와 같이 사회의 영역에 있어야 할 산업은 개인의 관리와 통제에 두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점은 쑨원(孫文)의 민생주의의 내용과 유사한데, 쑨원도 철도 등 대자본을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자본 측면의 사상과 별개로 토지 측면에서도, 헨리 조지의 지대조세제를 쑨원이 영국 망명 중에 톨스토이주의자들을 통해서 접하고 난 후, 그의 민생주의에서 비록 헨리 조지의 지대조세제와 똑같지는 않은 방식이지만, 토지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토지세 방식으로 평균 지권을 구현할 것을 주장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즉 헨리 조지와 쑨원의 사상은 토지와 자본 양 측면에서 모두 비슷했던 것이다.

또한 쑨원의 사상은 헨리 조지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할 수 있는 큰 틀이었다. 그래서 사회주의 중국과 자본주의 대만, 양쪽에서 체제를 뛰어넘어 쑨원이 추앙을 받아 온 것이다. 그런데 헨리 조지와 쑨원의 사상과 유사한 내용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기독교 사회민주당, 그리고 해방 직후 좌우 합작의 경제 정책에도 나타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독교 사회민주당, 좌우 합작의 경제 정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의 핵심은 ‘삼균주의(三均主義)’로서 조소앙이 기초하였는데, 조소앙은 당시 중국 쑨원의 민생주의 사상을 한국의 전통적인 균등 사상과 결합하여 삼균주의 중 ‘경제 균등’론을 기초하였다. 쑨원의 민생주의는 조소앙이 기초한 경제 균등의 내용인 ‘토지국유화’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와 비슷하다. 조소앙은 1904년에 <손문전(孫文傳)>을 읽었고, 1907년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 국민당원들과 교류하였는데, 이 때 교류한 대표적인 사람인 짜이찌타오(載季陶)는 1925년 『삼민주의의 철학적 기초』라는 저서를 통해 삼민주의를 민생철학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인물이었다. 1930년 8월 12일 조선총독부 경찰국은 일본외무성 아세아 국장에게 한국독립당의 경제균등론이 중국 국민당의 민생주의와 일치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바도 있다.

해방직후인 1945년 8월 28일,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표한 경제정책은 다음과 같다. "계획경제제도를 확립하여서 균등 사회의 복지생활을 보장할 것. 토지는 국유를 원칙으로 하되, 토지사용법, 지가세법(地價稅法) 등의 법률을 규정하여 한기 실시할 것. 국민의 현유(現有)한 사유 토지와 중소 규모의 사업(私業)기업은 법률로써 보장할 것. 토지국유는 점진적으로 실행한다." 이 중 특히 점진적 토지 국유 원칙하에, ‘국민의 현유(現有)한 사유 토지’는 법률로써 보장하는 대신 지가세법을 실시한다는 조항은 쑨원의 평균지권 사상 및 토지세 방식과 유사하다.

한편, 1945년 9월 초에 평북에서 창당된 한국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정당인 ‘기독교 사회민주당’(창당 직후 사회민주당으로 개명) 역시 쑨원의 민생주의와 유사한 정책을 표방했다. 기독교 사회민주당은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량”을 정강으로 삼았다. 최초에는 정당 이름을 ‘기독교 민주당’이라고 하였다가 얼마 후에 정당 이름에 대해 청년들과 지도부 간에 격론이 벌어져서 결국 이름을 ‘기독교 사회민주당’으로 바꾸기로 논의가 모아졌는데, 그 이유가 『한경직 평전』(조성기)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기독교 사회민주당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정신으로도 공산당이 내걸고 있는 평등사회를 충분히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토지 국유화나 대기업 국유화 같은 것은 공산당만이 내걸 수 있는 표어가 아니라, 기독 정신에 입각해서도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는 정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좋은 정책을 실현하는 데 굳이 유물론 사상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 발언에 나타나는 토지 국유화와 대기업 국유화는 쑨원의 민생주의의 두 가지 핵심 내용과 비슷하다. 비록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기독교계의 방어적 의미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 발언과 정책만 놓고 볼 때는, 한경직을 비롯한 기독교사회민주당원들이 그 후 월남하여 보여 준 반공 극우적 언행과 별개로, 최소한 이 당시에는 상당한 정도로 사회 개혁 의식과 경제 개혁 정책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개혁의 토대를 기독교 정신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해방 직후 좌우합작을 추진한 여운형과 쑨원의 관계도 특별하다. 여운형은 조선에 있을 때부터 1911년에 중국에서 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을 존경하였다. 그가 1917년에 중국에서 처음 쑨원을 직접 만난 이후, 그는 조선 독립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쑨원을 자주 만났는데, 쑨원은 조선 독립운동을 여러 가지로 도와주었다. 여운형은 중국 혁명이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1924년, 쑨원 생존 시에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였고, 1926년에는 광동 국민당 대표자대회에서 연설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좌우대립이 격화되고 남북 분단의 조짐이 나타나자, 여운형은 좌우합작을 최선을 다해 추진했는데, 이 좌우합작은 쑨원이 중국에서 실행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제1차 국공합작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1946년, 미국 기자 네 명과 인터뷰할 때, 기자들이 “사람들이 당신을 공산주의자라고 하는데 본인의 소감은?”하고 묻자, 그는 국공합작을 추진한 쑨원이 공산주의자인지를 반문하면서 자신도 쑨원처럼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친미주의자도 아니라고 답변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일궈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합작 7대 원칙’ 중에는 “토지개혁에 있어 무상 몰수, 유상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쑨원의 민생주의의 내용과 유사하다. 실제로 여운형은 쑨원의 삼민주의(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생각을 여러 차례 피력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기독교 사회민주당, 그리고 해방 직후 좌우 합작의 경제 정책은 쑨원의 민생주의와 비슷하고, 이는 더 거슬러 올라가면 헨리 조지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헨리 조지의 제3의 체제이자 통일을 위한 대안적 경제체제인 지공주의를 살펴보자.

통일을 위한 지공주의 경제체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발전적으로 통합하는 헨리 조지의 제3의 체제, 그리고 통일을 위한 대안적 경제체제는 바로 ‘지공주의’(地公主義, Geoism)이다. 지공주의란, “만인은 지권(地權)을 공유해야 한다. 이것은 지대(地代, 1년간 토지사용료)를 공유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이것이 진정한 토지공개념이다.”라는 의미이다. 영어 Geoism의 Geo-는 땅을 의미하며, 동시에 지공주의의 주창자인 헨리 조지(Henry George)와 그의 사상을 공유하는 조지스트(Georgist)의 명칭에 공통되는 접두어이다.

지공주의의 분배정의관은 “사회의 것은 사회에게, 개인의 것은 개인에게!” 분배하는 것이 정의롭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회의 것은 토지 사용의 대가이고, 개인의 것은 노동·자본 사용의 대가이다. 그래서 지공주의 정책은 매년 지대(地代) 전액을 환수하는 대신, 생산·유통·소비·소득·부 등에 대한 (준)조세를 최대 감면하는 것이다.

지공주의 체제는 분배의 형평성뿐만 아니라 생산의 효율성도 향상시킨다. 먼저 분배 측면에서, 지공주의 체제는 지대 공유를 통해 평균 지권 원칙을 구현하고, 토지 분배의 평등화를 촉진시키면서 소득과 부의 분배의 평등화도 촉진시킨다. 다음으로 생산 측면에서 지공주의 체제는 생산 의욕과 생산 활동을 촉진시키고, 토지의 최선 사용 및 신기업 창업을 촉진시킨다. 아래 <표>의 연구에 의하면, 지공주의 개혁의 생산 활성화 효과는 놀라울 정도이다. <표>에 의하면, 미국의 경우, 1993년 기준 국내순생산(NDP)이 5조 4950억 달러였는데, 지공주의 개혁을 하면 7조 970억 달러로 증가한다. 지공주의 개혁을 할 경우의 생산성을 100%로 하면 지공주의 개혁을 하지 않는 경우의 생산성은 77%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곧 23%의 잠재 생산성이 사장(死藏)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지공주의 개혁에 의해 사장되고 있는 잠재 생산성이 모두 발현될 경우, 경제가 비약적으로 활성화되어 고용을 창출하기 때문에, 실업과 저임금 빈곤 문제를 상당한 정도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표> 티드만(Nicolaus Tideman)과 플래스만(Florenz Plassmann)의 G7 국가 대상 연구


토지에 대한 증세가 생산과 고용을 모두 증가시킬 것이라는 점은 한국은행의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모의실험에 따르면 정부지출이 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경우에도 토지에 대한 증세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효과는 미약하지만 생산 및 고용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분석되었으며 소비는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토지라는 자산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반면에 토지 이외의 여타 부동산, 예를 들어 아파트, 주택 등의 건물 자체에 대한 증세나 근로소득에 대한 증세는 생산 및 고용을 모두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정부지출이 생산에 기여하는 경우에는 토지에 대한 증세가 생산과 고용뿐만 아니라 소비도 증가시키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것은 토지세만 강화하고 다른 세금은 감면하지 않은 경우의 결과인데, 만약 토지세를 강화하면서 다른 세금을 감면하면 경제 활성화 효과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럼 지공주의 경제체제를 통일을 위해 남과 북의 현 경제체제에 적용할 수 있는가? 그렇다. 북측은 토지를 국공유로 하면서 토지공공임대제를 실시하여 토지사용자에게 토지사용권을 팔고 그 대신 지대를 징수하여 최우선적 정부수입으로 삼고, 그 대신 생산·유통·소비·소득·부에 대한 (준)조세를 대폭 감면하면 된다. 남측은 모든 사유 토지에 대해서는 지대조세제를 실시하여 잠재 지대(地代: 1년간의 토지사용료)를 매년 토지소유자에게서 징수하여 최우선적 정부수입으로 삼고, 그 대신 생산·유통·소비·소득·부에 대한 조세를 대폭 감면. 공유 토지에 대해서는 토지공공임대제를 실시하면 된다.

지대조세제와 토지공공임대제는, 명칭만 다르지 실제 내용에서는, 지대는 전액 환수하고, 생산·유통·소비·소득·부 등에 대한 (준)조세는 최대 감면하는 지공주의 제도로서 남북이 바람직한 통일 경제체제를 이룰 수 있다. 이와 같은 지공주의 체제는 남측 자본주의 체제와 북측 사회주의 체제를 모두 발전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대안이다. 통일은 남북 동시 개혁적인 통일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지공주의는 통일의 대안인 것이다.

구체적인 지공주의 정책들은 아래 <표>와 같이 공유지와 사유지를 나누어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공유지에서는 토지 공공 임대 방식에 의해 지대를 환수해야 한다. 이와 같은 토지 공공 임대 방식은 주택(토지임대형 분양주택), 공단(토지임대형 공단), 신도시(토지임대형 신도시)에 적용할 수 있다. 둘째, 사유지에서는 토지보유세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신 건물분 보유세·부동산 거래세·부가가치세·소득세 등을 감면하는 조세 개혁을 해야 한다.

<표> 구체적인 지공주의 정책 개요

 

향후 통일헌법에 이와 같은 지공주의 국가 철학이 명문화되어야 한다. 현재 대만 헌법에는 쑨원의 영향으로 지공주의 철학이 담겨 있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의 평등한 토지권(平均地權)’, ‘토지의 국민 전체 귀속(土地屬於國民全體)’, ‘토지 가치의 국민 향유(土地價值... 歸人民共享之)’라는 주요 원칙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우리도 장차 통일 헌법에 대만 헌법의 토지 원칙들과 같은 대원칙들을 명시해야 한다. 예컨대 “토지는 국민 모두의 것 ... 모든 국민의 평등한 토지권 ... 국가는 토지 가치를 모든 국민이 향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는 조항이 포함되어야 한다.

여운형, 김구, 그리고 최춘선이 열망한 통일 독립 국가

여운형은 좌우합작 추진 과정에서, 합작 반대 세력들에 의해 몇 번이나 테러를 당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1947년, 극우 세력의 총을 맞고 운명하고 말았다. 쓰러지면서 그가 남긴 최후의 말은 바로 “조선······”이었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조선을 사랑했고, 그래서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 합작을 추진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는 1949년 암살당한 해, 그의 마지막 신년사에서, 소련식 공산주의도 아니고 미국식 자본주의도 아닌,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에 기초한 통일 독립 국가를 염원하였다. “우리는 이제 또 새해를 맞게 된다. 좋든 언짠튼 느낌이야 없으랴. 그러나 과거 일년을 살어온 나의 자취를 돌아보면 부끄러운 것뿐이다. 애국자로 자처하면서 동포가 굶어죽고 얼어죽고 그리고 또 서로 찔러 죽여도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통일론자라 하면서 점점 굳어가는 국토의 분열을 막지 못하였고 마땅히 할 말을 하지도 못하였다. 또 독립운동자라 하면서 독립을 위한 진일보의 표현도 하지 못하였다...... 쏘련식 민주주의가 아모리 좋다 하여도 공산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모리 좋다 하여도 독점자본주의의 발호로 인하여 무산자를 괴롭게 할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상품시장화 하는 데는 악질이다...... 우리는 ...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자주독립의 조국을 가지기만 원하는 것이다. 더구나 반쪽의 조국만이 아니라 통일된 조국을 원하는 것이다.”

맨발의 전도자, 최춘선은 대지주였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깨닫고 나서, 땅을 3천 평만 남기고 월남 피난민들과 빈민들에게 다 나누어주었는데 나누어 준 땅이 서너 동리를 이룰 만큼 엄청났다. 그는 땅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남긴 땅도 등기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 어떤 악한 사람이 자기 땅이라고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최춘선은 아예 그 재판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결국 땅을 빼앗겨 수백 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고아들을 거부하는 인심 때문에 그 장남이 30살이 될 때까지 30번 넘게 나그네처럼 이사를 다녀야 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나그네요 우거자일 뿐이라는 말씀(레25:23)을 그는 급진적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독립유공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주는 연금과 자녀들의 대학 학비 무료 혜택을 거부하였고 그래서 가족들은 힘들게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가 국가의 혜택을 거부한 이유는 조국이 완전한 독립과 통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민족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 그는 맨발로 30년 넘게 다녔는데,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단지 통일이 되면 신발을 신겠다고 이야기했다. 그가 지하철에서 손에 들고 있던 종이에는 ‘50년간 미룬 노예 해방, 38선 직통 해방’이란 글이 쓰여 있었다. 그는 우리 민족이 아직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이루지 못한 노예 상태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가 지하철에서 소천하는 순간까지 맨발로 다닌 것은 민족의 노예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그는 민족이 노예 상태에 처해 있기 때문에, 자신도 노예처럼 신발을 신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맨발이라는 선지자적 행위 언어로 우리에게 민족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그가 특히 학생들에게 말한 “미스 코리아 유관순, Why two Korea? 미스터 코리아 안중근, Why two Korea?”는, 유관순과 안중근 같이 나라를 사랑하고 자기를 내던져 희생한 사람들이 진정한 한국인이며,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두 개의 코리아로 분단된 민족이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 합작을 추진하다 총탄에 쓰러지면서도 평생 사랑했던 ‘조선’의 이름을 불렀던 여운형. 삼팔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분단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인 삼균주의에 기초하여 통일 독립 국가를 마지막까지 간절히 염원하다가 암살당한 김구. 그리고 땅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30년 넘게 맨발로 다니며 통일을 염원하면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자신의 사명에 충성을 다한 최춘선.

이제 우리가 여운형과 김구와 최춘선의 뜨거운 가슴으로 통일 독립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 헨리 조지와 쑨원의 사상을 승화시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는 지공주의 체제로 통일 독립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고통하는 자본주의와 실패한 사회주의를 보며 길을 잃고 방황하는 세계 인류 앞에 우리의 통일 독립 국가의 지공주의 체제를 모범 체제로 제시하면서 이 길로 가자고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한국 전쟁과 분단 60년이라는 고난의 잔을 영문도 모른 채 마셔야만 했던 우리 민족이, 수난의 역사를 영광의 역사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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